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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한] 궁금한 사람

dalian (다련) 2015. 10. 16. 13:54

창밖이 밝다. 아직 하늘은 푸르스름하고 흰 구름이 몽실몽실하게 떠다니는 4시 반. 이 시간의 하교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매일같이 10시까지 야자를 하고 가다가 하늘이 다채로울 때 집에 간다니, 집에 가서 공부를 하더라도 기분이 좋아졌다.


“두리야, 빨리 집 가자.”

“아, 잠만, 권셈한테 좀 갔다 올게.”

“세모한테? 왜?”

“4일 연휴잖아. 게임 좀 빌리려고. 권셈자식, 새로 나온 게임 갖고 있다고 그래서. 왜? 권셈 반 들렸다가 바로 내려갈래?”


하여간, 차두리. 시험이 다음 주인데. 세모 반을 들렀다 가려면 돌아가야 하긴 하지만, 그냥 같이 갈까.


“그래. 같이 가자.”




세모는 문과라서, 앞에 있는 반인데다가 10반인 나와 두리와 다르게 1반이라 세모반을 거쳐서 내려가면 정문까지 더 멀어진다. 그런 탓에, 세모를 찾아가는 건 오랜만인 것 같아 조금 설레었다. 그래서일까 책을 가득 넣어 무거운 가방이 오늘따라 가볍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곧, 1반에 도착해 두리가 뒷문을 세게 열어서 세모를 크게 불렀다. 두리를 보고 무감각하게 가방에서 게임을 꺼내 주던 세모를 지켜보다가 세모와 눈이 마주쳤다. 이상하게 들뜬 내 기분 탓인지 세모의 표정이 약간 상기된 것처럼 보였다.


“하나야, 넌 웬일이야?”

“어? 난 두리랑 같이 집 가려고.”

“아... 그럼, 하나야, 너 집 가서 공부 할 거지?”

“응.”

“그럼, 나도 같이 해도 돼?”

“그래.”

“뭐야! 권셈, 넌 그럴 바엔 나랑 게임해! 너도 이제 차하나처럼 범생이 같이 왜 그래?”

“우리 시험기간이거든?”


세모와 함께 공부하는 것도 오랜만인데, 오늘은 오랜만인 일이 많네. 드문, 이른 하교가 많은 추억을 이끌어온 것 같았다. 매번 걷던 하굣길에 또 새로운 추억 하나를 더하고, 세모와 두리가 티격태격하는 소리를 더하고 푸르스름한 하늘이 점점 붉어지는 장면을 더하면서 집에 도착했다.



“아빠, 세모 왔어요!”

“안녕하세요.”

“아, 세모 왔니? 오랜만이구나. 두리야, 좀 이따 부를 테니, 간식 좀 가지고 올라가렴.”

“네에~.”


아빠에게 인사를 하고 내 방에 올라가려는데 세모가 나와 같이 인사하더니 내가 아빠와 좀 더 얘기하는 사이에 나보다 먼저 내 방에 올라갔다. 세모가 우리 집에 자주 와서 익숙하긴 했지만, 세모가 나보다 먼저 내 방에 올라가는 걸 보자니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상해질 만한 일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러지?


뭔지 모를 찜찜한 기분을 뒤로하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서 탁자에 펼쳤다. 세모가 먼저 도착해서  넓은 탁자를 펼쳐 놓았기 때문에 내가 펼칠 필요가 없었다. 수고를 덜어준 세모에게 감사해하며 공부를 시작했다.


“두리야! 간식 가지러 내려오렴!”

“ 아씨, 지금 못 내려가는데... 차하나, 대신 좀 내려가줘.”

“나, 공부 중이잖아. 니가 가.”

“권셈! 니가 좀 가주라. 응?”

“어.”

 

한창 수학 문제를 풀던 중이라, 두리의 말을 흘려들으면서 계속 공식을 이어나갔다. 풀고 있던 문제를 마무리하고 고개를 들었더니, 간식을 먹고 있는 세모가 보였다. 세모는 나랑 눈이 마주치자 접시에서 쿠키 하나를 집어서 내게 건네주었다.


“하나야, 이거 먹어. 박사님이 직접 만드신 쿠키야.”

“어, 응, 고마워.”


맛있다고 볼까지 빨개져서 쿠키를 먹는 세모는 가끔 지나가면서 볼 때보다 좀 더 잘생겨 보였다. 머리가 조금 더 길어진 것 같기도 하고. 잘 보지 못하다가 가까이서 보니까 달라진 점이 눈에 들어오네.


“세모야, 너 웃으니까 잘생겼다.”

“켁, 뭐? 뭐라고?”

“아니, 그냥. 잘생겨 보여서.”


잘생겼다고 말한 게 그렇게 놀랄 일인지, 세모는 사례가 들렸는지 컥컥 대다가 주스를 마셨다. 진정되고 나서도 얼굴 전체가 붉어진 게 꽤 많이 놀랐나 보다.


“많이 놀랐어?”

“... 아냐, 괜찮아. 계속 공부하자.”


한참을 수학을 풀다가 이제 다른 과목을 하려고 책을 덮고 앞에 있던 물리책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세모와 시선이 마주쳤다. 세모는 바로 얼굴을 책으로 박았다.


어? 세모가 보고 있는 페이지는 공부 시작 때 세모가 보던 페이지랑 똑같은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수학을 풀 때도 슥슥 하는, 내가 수학 공식을 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많이 어려운가?


“세모야, 많이 어려워? 그 문제, 내가 풀 수 있는 데 가르쳐줄까?”

“어? 아니야. 괜찮아. 너 계속 공부해.”

“하지만, 너 아까부터 계속 그 페이지잖아.”

“.... 그럼 부탁할게.”


어, 또 얼굴 빨개졌다. 문제 못 푸는 게 창피한가? 괜찮은데. 모르는 문제에 계속 도전하는 건 좋은 거고.



“... 알겠어?”

“이 부분만 다시 해줘.”

“응.”


그다음엔 서로에게 아무런 얘기도 없이 공부만 했다. 조용한 방에 가끔 두리가 게임에서 지기라도 했는지 으악 하는 소리와 시곗바늘이 흘러가는 소리만 들렸다. 시간이 8시쯤 되었을 때, 누군가 톡 쳐서 고개를 드니 세모가 간다고 조용하게 말했다. 배웅해주려고 일어났는데 내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려왔다.


“배웅 안 해줘도 돼. 전화받아.”

“그래도, 잠시만 기다려.”


“여보세요?”

“하나야?”

“어, 오공아.  왜?”

“아, 오늘 너한테 화학 2 빌리려고 했는데, 니가 먼저 갔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내일 너네 집 가서 공부하면서 좀 봐도 돼?”

“응. 그럼. 내일 와.”

“고마워! 내일 봐!”


세모가 문을 열던 손을 멈췄다. 통화가 끝난 후에도, 세모는 문 앞에서 멈춰 서있었다. 역시, 오늘 좀 이상하다 싶어서 어디 아프냐고 말을 걸려고 했는데, 세모가 뒤돌아서 내게로 다시 왔다.


“오공이야?”

“응.”

“내일...오공이 만나?”

“응. 우리 집에 공부하러 온대.”

“그럼, 나도 또 와도 돼?”

“응. 그래.”


문 앞까지 나가서 세모를 배웅했다. 잘 가라고 말하는 데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답도 들리지 않아서 문을 점점 닫고 있었는데, 닫히는 문틈 사이로 아까완 정반대로 핏기 없는 얼굴이 살짝 보였다. 나지막하게 목소리도 들렸다.


“내일 봐.”


문이 닫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세모가 이상했던 것 같아서, 아직도 게임을 하고 있는 두리에게 물어봤다.


“오늘 세모 좀 이상하지 않았어?”

“뭐가? 걔 원래 그렇잖아. 네 앞에서.”

“... 그런가? 난 처음 알았는데”

“넌 공부 말곤 다 바보잖아.”

“뭐? 그런 말은 또 처음 들어본다.”

“몰라. 몰라. 게임하잖아.”


두리가 얘기할 때 내 얼굴을 보면서 말하다가 다시 게임에 시선을 돌리고 옆으로 누우면서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길래 공부했던 책상이나 치울까 해서 책상 위의 책을 정리했다.


“차하나, 완전 바보멍청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