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후리

[아베미하] 비 오는 날

dalian (다련) 2016. 5. 2. 23:52

비 오는 날, 그 눈물들 사이의 잔인하게 달콤한 너를 봤다.



아주 오랜만에 경기가 우천 취소되었다. 거기다가 내일은 쉬는 날이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기분이 좋았다. 너와 함께 했던 고교시절, 그때와 달리 이곳엔 네가 없었기에 너를 만나게 해줄 이 비가 좋았다. 우천 취소 소식을 듣고,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나가는 도중에 들려온 짓궂은 동료의 놀림도 좋았다. 내 얼굴을 보고 놀랐다가 환하게 웃어줄 네 모습이 상상되는 것도 너무 좋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어느새 내 마음 안에 고여서, 터지기 직전의 물 풍선처럼 부풀어올라서 그래서 기분이 자꾸만 들떴다.


오늘 원래 경기를 했어야 하는 경기장과 네 회사가 가까워서 들뜨는 마음도 식힐 겸 네가 있는 곳까지 걸어왔다. 비를 막기 위해 편의점에서 산 우산이 네 머리색과 같다는 그런 사소한 것에도 조금 식힌 마음이 다시 전보다 크게 물이 차올랐다. 네가 퇴근할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회사 정문이 보이는 횡단보도 건너편에 도착했다. 네가 있을 곳만을 바라보는데 순간 눈앞에 물안개가 피었다. 흐려진 시야에 눈을 깜박깜박 했다. 물안개가 사라지고는 갑자기 비가 눈앞을 흐렸다. 근처에 내리는 모든 비가 제 시야 앞으로 집중된 것 같았다. 그 비들 사이에 선명하게 네가 보였다. 환하게 웃고 있는 네가 보였다. 그리고 초록불이 되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네 쪽으로 가고 네가 내 쪽으로 오는 것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했다. 뒤에 있는 사람의 우산과 부딪치고 그 사람의 짜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뒤돌아서 도망쳤다. 너와 네 팔짱을 끼고 네 눈빛을 마주하는 그 여자가 보기 싫었다. 마음 안의 가득 찬 빗물이 갑자기 차가워진 것 같았다. 사실, 원래 차가웠던 거였겠지만.


추웠다. 마음 안쪽에서 갑자기 바람과 함께 차오른 물 때문인지, 손에서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는 널 닮았던 우산이 이 비를 더 이상 막아주지 않아 젖어버린 내 몸 때문인지 느낄 수 없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방금, 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던가? 비밀번호를 눌렀던가? 난 어떻게 집까지 왔지? 택시를 탔었나? 걸었나?


흐릿한 정신 속에서 여러 가지 기억들이 뒤섞여 갔다. 그중, 나는 행복하게 웃고 있기도 했고, 비를 맞으며 울고 있기도 했다. 그중 어느 것이 제대로 된 기억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시합이 끝나고 확인해본 휴대폰에 이미 와 있는 너의 문자와 그걸 보고 좋아하는 나 같은 추억은 전화도 받지 않는 너와 바람이라고 말하던 동료의 장난으로 바뀌었다.


역시, 가보지 말걸 그랬는데. 의심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들뜨지도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그래도 너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데.


실내에서도 계속 비가 왔다. 얼굴도 손도 계속해서 차가워졌다. 이제 더 이상 비가 나오지 않을 땐, 밖이 깜깜해져 있었다. 집에는 아직 나뿐이었다. 어두워진 집 안에서 불을 켜고, 따뜻하게 목욕도 했다. 옷도 갈아입었다. 여전히 혼자였다. 다시 비가 내렸다.

 


*



비가 내렸다가 그쳤다가 하는 걸 보고만 있다 보니 어느새 해가 뜨려고 하고 있었다. 밤새도록 환하게 켜둔 불을 곧 꺼도 될 것 같았다. 이제 불을 끄고 거실이 아닌 방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도 옆집이면 어떡하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뒤를 돌아봤다. 옆집이 아니었다.


“... 렌?”

“으,응.”

“왜 안 자고 있어?”

“그, 냥.”

“..목 상태는 또 왜 그래? 비 맞았지? 어제 보니까 우천 취소 됐던데 왜 안 쉬고 있었어?”

“아, 알고 있,었네.”

“당연하지.”


네가 당연하다면서 내 상태를 다 알아챘다. 네 말대로 나는 목이 조금 쉬었다. 아프다. 비도 맞았다. 경기가 우천 취소되었다. 그리고 쉬지 않고 널 보러 갔다.  그럼 이것도 알고 있을까. 나는 아직도, 여전히 너를 사랑해.


“타카야, 날... 사,랑해?”

“넌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냐?”

“나도, 사,랑해.”


네가 얼굴을 붉히더니 씩 하고 웃어줬다. 나쁘다.


“오늘 쉬지?”

“응.”

“저녁에 외식하자. 예약해놨어.”

“.. 응.”


말없이 기다릴게. 네가 말해줄때까지. 아직 내게 말하지 않는다는 건, 아직은, 아직은 내게 미련이라도 남아있다는 거니까. 나는 너를 아직 사랑하고 싶으니까. 내게 앞으로도 잔인해줘. 썩은 동아줄이라도 계속 붙잡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