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미하] 전하지 못한 단 한마디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정리하던 중, 아주 낡은 상자를 발견했다. 어디선가 선물로 받았던 것 같은 예쁜 무늬의 상자는 먼지가 쌓이고 빛바래 회색이 되어버린 그저 더러운 상자로 바뀌어 집안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 뭐가 들어 있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아서 열어보았을 때, 한눈에 그 단추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는 그 단추. 결국 전하지 못한 나의 두 번째 단추.
결국 졸업식 날이 왔다. 고등학교 졸업식. 야구부로서의 생활은 여름에 끝이 났지만 그래도 계속 볼 수 있었던 렌과 정말로 헤어지게 되는 날. 영영 헤어지는 게 아니라곤 하지만, 니시우라 현 내의 대학으로 진학한 나와 달리 렌은 군마 현으로 가게 되었으니 내겐 완전함에 가까운 헤어짐이었다.
졸업식이 시작하기 전에 할 말이 있다는 렌에게 나도 나의 할 말을 전하기 위해 졸업식 시작보다 일찍 도착했다.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어제 미리 떼어둔 중학교 교복의 두 번째 단추를 손으로 굴리면서, 괜히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렌도, 나 하고 같은 생각으로 날 부른 걸까?
만나기로 한 부실로 가면서 진정시키려 해도 자꾸만 들떠서, 계속 속으로 진정하자고 외쳤지만 역시나 진정되기 보단 기쁜 상상에 빠지기만 했다. 바로 부실에 가지 않고 부실이 있는 건물 뒤편에서 진정하고 가기위해 건물 뒤편의 나무가 슬그머니 모습을 보일 때까지 걷다가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렌, 좋아해. 나랑 사귀자.”
타카야였다. 고개를 조금 빼어 힐끗 본 타카야 앞에 서있는 연갈색 머리의 주인은 렌일게 틀림없었다. 달아올랐던 기분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차갑게 느껴지지 않던 바람이 지금은 손끝이 얼어버릴 정도로 차갑게만 느껴졌다.
타카야가 렌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은 했었다. 아니, 생각뿐만이 아니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타카야는 내가 눈치채고 있는 걸 모르는 것 같았지만, 나는 모를 수 없었다. 타카야가 렌을 지켜보는 만큼 나도 렌을 지켜봤으니까. 그리고 렌 옆에 항상 있는 타카야도. 그렇지만, 타카야가 고백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 했다. 본인이 렌을 좋아하고 있는 걸 모르고 있었으니까. 영원히 자각하지 않기를 바랬는데.
“나, 나도 타카야가 좋,아.”
아, 최악이다.
렌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계속 울렸다. 설렘은 단 한 조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끝까지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뒤돌아서 부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둘의 말이 끊어지지 않은 것 같았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부실에 앉아서 렌을 기다리면서 무심코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단추를 만졌다. 금속 특유의 차가움이 너무 시리게만 느껴져서 눈물이 났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심장을 타고 올라와 눈에서 다시 내리는 내 눈물조차 차갑게 느껴졌다.
부실에 가까워오는 누군가의 발소리에 뚝뚝, 흘러내리는 눈물에 소매로 닦아내고, 소매로 눈을 거칠게 비비면서 눈물을 멈췄다. 눈이 따가웠지만, 무시하고 문을 쳐다봤다. 렌이었다.
“왔어?”
“으, 응. 늦,었지.”
“아니야. 내가 빨리 왔어. 왜 보자고 했어..?”
“아, 어, 그런,데 코우스케, 울,었어?”
“....아냐. 괜찮아.”
생각대로 티가 나서 걱정하는 것 같아 미안하면서도 좋았다. 렌이 지금은 나만 보고 있으니까. 비록, 그 눈엔 사랑은 없이, 걱정뿐이겠지만.
“나는... 괜찮아. 렌이 하고 싶다던 말해.”
“나,나는..”
“렌, 식 시작하려고 하는데.”
렌이 말을 하던 중에 타카야가 들어왔다. 렌과 말을 하다 왔으니 근처에 있겠다곤 생각했지만, 부실 앞에서 기다릴 줄은 몰랐는데. 뭐, 둘은 연인이니까. 손끝이 조금 떨려오는 게 느껴졌지만, 꽉 주먹을 쥐며 참고 렌에게 말했다.
“렌, 계속해도 돼.”
“으, 으 아, 아니야. 나중,에.”
결국, 나는 그 말을 아직 듣지 못 했다. 식이 끝나고 렌은 가족들과 바빠 보였고, 며칠 후에 전화로 물어봤을 때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리만 들었다. 타카야가 렌에게 고백하는 것을 본 뒤에도 아주 조금은 남아있던 기대가 전화가 끝나고, 정말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아직 나의 두 번째 단추를 주지 못 했다.
*
옛날에 내가 입던 옷들을 엄마의 아는 사람의 아들에게 준다면서 같이 찾자고 하는 엄마를 돕다가 고등학교 때 교복 대신 입던 옷들을 발견했다. 추억에 젖은 엄마가 어머 하면서 내가 고등학교 때의 얘기를 하는 걸 듣고 있다가 뭔가 떠올랐다. 엄마가 들고 있던 검은 바지를 휙 잡아뺏은 후 주머니 안쪽을 뒤적거렸다. 뭔가가 만져져서 빼 보니 역시 단추였다.
“렌, 그거 미호시학원 교복 단추 아니니?”
“..응.”
미호시를 다닐 때 입었던 교복의 두 번째 단추. 내가 니시우라를 졸업하는 날, 코우스케에게 주려고 했던 그 단추였다. 결국, 전해주지 못했지만.
“그게 왜 거기에 있지? 버릴까?”
“아니야. 이건, 버리면 안돼.”
앞으로도 전해주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나는 코우스케가 좋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