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미하]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망소재 주의
새까만 공간에서 눈을 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어두운 공간에서 눈이 적응하기도 전에, 이미 어둠이 숨기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찢어진 종잇조각들, 터진 베개에서 나온 솜뭉치들, 굴러다니는 여러 술병들이 바닥을 뒤덮어 엉망인 집안, 그 사이에 힘없이 누워있는 한 남자. 엉망진창인 집처럼 남자의 모습도 멀쩡하지만은 않았다. 부어있는 눈가와 마른 눈물자국, 입고 있는 셔츠는 뒹굴기라도 했는지 마구 구겨져있었다.
남자를 가까이서 살펴보기 위해 다가가다가, 여기저기 놓인 것들을 피하려 술병을 밟고야 말았다. 바닥에 부딪힐 아픔에 눈을 질끈 감았는데, 몸이 앞으로 쏠리는 느낌이 나지 않아서 눈을 떴다. 내 발은 술병을 관통해 바닥에 닿아 있었다. 아니, 닿아있는 걸까? 놀란 마음에 큰 소리를 냈다. 남자가 뒤척이며 일어나려는 움직임을 내자, 그제야 내가 얼마나 큰 소리를 냈는지 깨달았다. 뒤늦게 입을 손으로 막았지만, 이미 남자는 일어났다.
“으, 머리야. 아,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
남자가 일어나서 머리를 부여잡더니, 주위를 둘러보다 불을 켜기 위해서인지 스위치로 향해 갔다. 똑바로 가는가 싶더니, 스위치 앞에 다다르기 전, 갑자기 주저앉았다.
“젠장...”
땅을 짚고 일어나려던 남자는 다시 한번 주저앉았다. 손을 뒤로 짚고, 숨을 깊게 들이쉬고 꽤 진정을 하고 나서야, 남자는 일어날 수 있었다. 벽에 몸을 기대면서 스위치를 눌러 밝아진 풍경에 잠시 눈을 찌푸리던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고 허탈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래, 렌이... 있을 리가 없지.”
*
눈을 뜬 이후로, 꽤 오랫동안 남자의 곁에서 머물면서 알게 된 것들이 있었다. 첫 번째, 나는 유령이다. 유령이면 무서워했던 내가 유령이 된 것에 너무 놀라서, 물건을 통과한다던지 하는 유령임을 자각하는 상황에서는 비명을 지르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남자는 내가 있는 쪽을 돌아보곤 했다. 마치, 내 목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곧, 이상한 표정으로 다시 앞을 쳐다봤지만.
두 번째, 남자의 이름은 하루나 모토키로, 야구 선수다. 처음에 보았던 피폐했던 모습은 그 다음날 사라졌다. 그날 저녁까지도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울고 웃던 남자는 다음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한 모습으로 유니폼을 챙겨 출근했다. 남자의 집에서 나와서, 남자를 따라다니다 알 수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남자가 눈에 밟혀서 떠날 수가 없었다.
세 번째, 남자는 연인을 잃었다. 밖에 나가서는 괜찮은 척, 멀쩡한 척하면서 친한 사람과 장난을 치던 남자는 집에 와서는 아무 표정도 없이, 그저 할 일만 하다가 모든 일을 마치면 연인과의 사진을 보면서 울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남자는 어느 날엔 한참을 사진이 든 액자 앞에서 손을 왔다 갔다 하더니 떨리는 손으로 액자를 서랍장에 넣었다. 남자는 시선을 서랍장에서 떼지 못 했다. 이것저것 해보려 애쓰다, 결국 침대에 누운 남자는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불을 켜고 액자를 제자리에 놓았다. 다시 돌아온 액자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날, 남자는 잠에 들지 못 했다.
네 번째, 나는 이 지역을 떠나지 못한다. 남자를 따라다니는 것이 내 일상인 만큼, 남자가 다른 지역에 경기를 갈 때도 따라가려고 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남자가 타 있는 버스에서 튕겨져 나왔다. 빨리 뒤쫓아가려 해도 사이타마현에서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남자가 외부지역으로 가는 날엔 지금처럼 남자의 집에서만 지내곤 했다. 텅 빈, 매일 보는 집안에서 아무런 물건도 만지지 못한 채로 혼자 있는 것은 너무 심심해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특히, 나가서 야구를 보고 싶었다. 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지만, 나는 만질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나가지 않았다. 혹시나, 돌아다니다가 남자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면, 남자를 다시 볼 수 없게 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남자 없이 돌아다니지 않았다. 아직은, 남자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곧, 남자가 돌아올 시간이다. 지루한 시간이 끝나겠다. 남자가 없는 방에 볼 것은 딱히 없었다. 단 하나,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남자가 아끼는 액자 하나. 액자 속에는 남자와 남자가 항상 울면서 부르는 ‘렌’이 있다. 남자는 ‘렌’의 허리를 감은 채로 ‘렌’과 마찬가지로 환하게 웃고 있다. 지금의 남자에게선 볼 수없는 얼굴이다.
나는 남자가 항상 그러는 것처럼 액자를 쓰다듬었다. 남자와 다른 점은 나는 ‘렌’이 아니라 남자의 얼굴 부분을 쓰다듬었다는 걸까.
손가락이 표면에 닿지 않게 조심해서 쓰다듬다가 결국 너무 가까웠는지 손가락이 액자를 통과했다. 투명한 손가락 때문에 여전히 남자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 기분이 좋지 않아 손가락을 확하고 뺐다. 그리고 액자가 떨어졌다. 만질 수 없으니, 내가 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이상한 기분을 뒤로하고, 떨어진 액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하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들어오던 남자는 문에서 바로 보이는 거실 중앙의 텅 빈 탁자를 쳐다보고는 헐레벌떡 뛰어왔다. 탁자 밑으로 떨어진 액자를 주워들더니 깨진 유리조각에 손이 다치고 있는 것도 잊고 사진을 확인했다. 사진엔 이상이 없는지, 이리저리 들고 확인하더니 이내 사진을 가슴에 묻으면서 울었다.
“렌, 렌...미하시, 미하시 렌.”
“제발, 제발, 제발...”
“보고 싶어. 보고 싶다.”
남자의 나머지 말들은 평소와 같았지만, 첫 번째 말에 나는 내가 왜 남자를 떠날 수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미하시 렌.
그건 나였다. 내 이름이었다. 남자, 하루나 선배의 말에 나는 잊고 있었던 모든 걸 떠올렸다. 나는 죽었다. 하루나 선배의 고백의 답을 전하러 가던 날에.
졸업식 날, 누구보다라고는 할 수 없지만, 땀 흘리며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는 우리들의 여름도 끝나고, 정말로 3년이 끝나버리게 되는 그 겨울날, 하루나 선배에게 고백받았다.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꽃다발을 건네면서 둘이서 할 말이 있다고 할 때에도 눈치를 채지 못했었다. 하루나 선배는 내가 좋아하는 멋진 투수고, 그저 존경하는 선배였을 뿐이기에.
그랬기에, 나는 정말 그가 계속해서 주저하면서 달아오른 얼굴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 모습이 싫지 않은 나 자신도.
“... 미안하다, 미하시.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그냥 네가 좋다고 말하고 싶었어.”
“서, 선배. 저는, 저는... 나중에 대답, 시, 시간을 주, 세요! 대답, 할 거예요!”
그 날, 졸업식을 기념한 엄마, 아빠와의 외식에서도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에 집중할 수 없었다. 도통 먹지 않는 나 때문에 걱정하시는 모습이 보였지만, 괜찮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고백의 답을 내기 위해, 내 모든 시간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 썼다. 침대에 누워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보름이 지나도, 내려지지 않는 결론에 오늘은 꼭 답을 하자고 이젠 지겨울 정도의 다짐을 하고, 또 마음속 질문들을 되뇌었다.
하루나 선배가 고백했어. 응. 나는 싫어해? 아냐. 거절하면 되는 거 아닐까? 그건, 싫어. 그럼 좋아하는 걸까? 모르겠어.
“하지만, 정말, 모,르겠어.”
결국, 또다시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한 채로, 저녁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의 소리에 내려갔다. 밥을 먹으면서도, 집중하지 못하고 젓가락으로 보이는 것을 집어먹고, 입으로 씹기만 반복했다.
“렌, 정말.. 아무 말도 안 해 줄거니?”
“... 모르겠어.”
“뭐를?”
“뭐, 라도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답을 못하겠기에 고민하고 있는 거야?”
“응.”
“그럼, 그 기분까지 말해보면 어떨까? 편지로 쓴다던지..”
“편지...”
아무런 답도 못하고 계속 기약 없는 약속으로 하루나 선배를 기다리게 하는 것보다는 이 정의할 수 없는 기분이라도 전하고 싶어서 그날 새벽, 편지를 썼다.
다음 날 아침까지 잠에 들지 못한 채로, 하루나 선배에게 편지를 전하고자 하루나 선배가 기다린다고 한 약속 장소로 가던 중, 그때, 나는 죽었다.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다시 생각해도 너무 무서운, 엄청난 고통이 느껴지고 정신을 잃었었다.
하루나 선배와의 약속이었으니, 하루나 선배는 내 죽음을 봤겠구나.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동안에, 선배는 얼마나 울었을까. 내가 선배한테 상처를 입혔어.
그제야, 나는 왜 하필 그의 곁에서 눈을 떴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몸을 웅크리고, 사진을 손에 꽉 쥐고, 가슴에 파묻으면서 우는 이 사람에게 전하지 못한 말이 있어서.
투명한 손으로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쓰다듬고, 웅크린 몸을 껴안았다. 울음이 진정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닿았는지, 조금씩 하루나 선배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조금 진정한 듯이 보이는 선배를 차근히 살펴보다가, 사진 뒷면의 흰 부분이 빨개진 것이 보였다. 피였다. 유리조각에 손이 다쳐 피가 배어 나온 것이었다.
“선,배. 손가락에서 피가 나,와요. 선배의 손은, 중요해요.”
“하루나 선배, 울지, 마세요. 이제는 잊어도, 괜찮아요. 선배 탓, 이 아, 니에요.”
“저도, 선배가 좋,았어요.”
멈춰있던 하루나 선배의 눈물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선배는, 괜찮아요.”
한참을 더 울던 하루나 선배는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을 편지 하나와 함께 태웠다. 사라져버린 조각들을 대신해서 생긴 재 가루를 선배는 손에 쥐었다가 그대로 바람에 날려 보냈다.
마지막에 태워지기 전, 편지에 쓰여있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하루 종일, 계속해서 고민해도 잘 모르겠어요. 선배와 헤어지기 싫어요. 선배가 고백해도 싫지 않아요. 선배가 좋은 걸까요? 기분이 이상해요.
선배, 이제는 선배가 좋다고 말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