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zalea
[공한] 밝히는 사람 본문
일찍 끝났다. 연휴 때문에 다들 시끌벅적하게 어디 어디 간다고 말하고 있는 반 아이들 틈새에서 조용히 창밖만 바라보았다. 애들이 하나 둘 가방을 싸서 사라지는 걸 소리로 느끼다가 몇몇만이 남아있을 때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가로 떠나지도 않아서 집에서 시험공부나 할 겸 책을 챙기다가 화학 2 필기를 베껴야 하는 게 생각이 났다. 급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나의 얼굴을 볼 기회다.
“하나야-.”
아직 잠기지 않은 하나의 반을 보고 문을 슬쩍 열고 불렀다. 그렇지만 안에는 모르는 아이 한 명뿐이었다.
하나는 짐을 빨리 챙기는 편도 아니라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너무 늦었나.
“하나는 아까 두리랑 세모 반에 갔어.”
“아, 고마워.”
모르는 아이는 하나와 꽤 친한 건지 나까지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세모 반에 갔다니, 세모가 보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겠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권세모에게 한 방 먹은 것 같았다.
걸음을 바삐 해서 빨리 권세모 반으로 갔다. 꽤 빨리 갔음에도 권세모의 반은 잠겨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창문으로 운동장을 쳐다봤는데 정문 근처에 하나가 보였다. 옆에 두리와 권세모도 있었다. 하나를 보면서 기뻐하는 권세모를 보자니 온몸의 핏기가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 권세모 기분 좋아 보이네. 반칙이야.
*
하나를 좋아하는 걸 깨달은 건 거제도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다. 이사를 간 후에도 하나와 꾸준히 연락을 했고, 뜸하더라도 다른 아이들과도 연락을 자주 했다. 하나와 대화하면서 웃었고, 새로운 친구들과 지내는 얘기가 부러웠다. 그런 내가 하나를 좋아하는 걸 깨닫는 건 쉬웠다. 그저, 거제도에서 사귄 친구들과 놀면서도 하나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걸 알았으니까. 그리고 그게 사랑임을 깨닫는 건 적어도 내게는 어렵지 않았다. 사랑임을 인정하면 끝나는 거니까. 그리고 인정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도 내가 발견했다. 권세모.
세모와도 연락을 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세모가 변해가는 걸 찾는 것 역시 쉬웠다. 다른 아이들은 몰랐겠지만, 항상 붙어있는 게 아닌 가끔 연락하는 나라면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세모는 내가 이사 온 직후의 연락과 달리 점점 하나에 대한 언급이 많아졌다.
“세모야, 요새 하나 이야기가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다른 애들이랑도 놀 거 아냐.”
“..... 내가 하나 이야기만 했다고?”
“어. 요새 너 계속 그래. 짝사랑하는 사람처럼.”
내가 한 번 떠보듯이 세모에게 말을 했을 때도 세모는 그때까지 인지를 못 한 건지 하지 않은 건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 말 이후로 세모는 말을 얼버무리다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한동안 연락이 없다가 몇 달쯤 후에 연락이 왔다.
“오랜만이네.”
“응. 미안. 생각할게 있어서. 그래서 말인데, 넌... 아, 아무것도 아니야.”
“니가 하나 좋아하는 것 같다는 그 말 때문에 전화했어?”
“... 어.”
“역시나, 세모 너 진짜로 하나 좋아하지?”
“....”
“나도 하나 좋아해. 내년이면 나 대도시로 갈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세모야, 권세모. 넌 내가 대도시 갈 때까지 하나한테 고백 못 할 거야. 안 하겠지. 근데 나라면 그렇게 망설이진 않아.”
그날 이후, 내가 대도시로 가기 전까지 권세모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내가 대도시로 가는 날, 내가 권세모에게 문자를 했다. 하나에게 간다고. 대도시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하나에게 갔을 때, 하나 옆에 권세모가 있었다. 권세모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불안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하나와 반갑게 인사하고 권세모의 어색한 인사를 받으면서 대도시에 돌아왔다.
학교에서 마주쳐도 권세모와 제대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보이면 어색하게 인사한 후 빨리 가버렸으니까. 하나와 둘이 있는 모습을 볼 때도 내가 다가가면 권세모가 피했다. 문과 이과가 갈리고 나서는 내가 하나와 있는 시간이 늘어서 권세모는 더 보기 힘들어졌다. 그랬는데. 역시 권세모야.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행복하게 하나랑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나.
“여보세요?”
아, 받았다.
“하나야?”
“어, 오공아. 왜?”
“아, 오늘 너한테 화학 2 빌리려고 했는데, 니가 먼저 갔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내일 너네 집 가서 공부하면서 좀 봐도 돼?”
“응. 그럼. 내일 와.”
“고마워! 내일 봐!”
권세모, 잘 들었을까. 겁쟁이 권세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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