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zalea
[셈한공] 숨기는 사람 본문
학교가 끝났다. 일찍. 이 시간에 집에 가면 아빠가 평일에 같이 있는 게 얼마 만이냐면서 반갑게 맞아주시고, 먹고 싶은 것을 맘껏 먹자며 저녁을 만들어 주실 것이 눈에 선했다. 내일도 모레도 집에 있는 연휴 중에 하루는 작년처럼 하나네 집에 가게 될 수도 있었다. 우리 집과 하나네 집은 항상 대도시에 남아있었고 남아있을 테니까.
어차피 다른 반 아이들처럼 어딘가로 가지 않고 게임을 빌려달라던 두리가 아직 오지 않아서 느릿하게 책들을 챙겼다. 천천히 해서 가방을 잠글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뒷문을 쳐다보니 역시 생각대로 차하나와 같은 갈색이 보였다.
가방에서 게임기를 꺼내서 다시 뒷문을 쳐다봤다. 두리에게 조심히 쓰라고 말하려고 했던 생각이 무색하게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차하나가 있었다. 차하나가 있다라는 걸 인지하고 나니 심장이 온몸에서 울리는 느낌이었다. 쿵쿵대는 소리와 함께 피가 파도처럼 발끝에서 머리까지 확 밀려왔다가 얼굴에서 멈췄다. 얼굴이 너무 뜨겁다. 혹시나 하나에게 들킬까 싶어 힐끔 쳐다보았다가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얼굴이 너무 뜨겁다. 혹시나 하나에게 들킬까 싶어 힐끔 쳐다보았다가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계속 보고 있었을까? 얼굴이 빨갛게 보이면 어쩌지?
빨리 두리에게 게임기를 건네주고 반에서 나가야 했지만, 너무 당황했는지 생각과 몸이 다르게 행동했다.
“하나야, 넌 웬일이야?”
당연히 두리랑 같이 집을 가려던 길인 것을 알았지만, 입에선 아무 말이나 튀어나왔다. 바보같이.
“어? 난 두리랑 같이 집 가려고.”
역시나, 두리랑 같이 집을 가는 게 맞았다. 이미 바보같이 굴었던 걸 알지만, 같이 하교가 하고 싶어졌다.
같이 하교하자고 말하는 건 이상하지 않겠지? 우린 친구고, 집 방향도 똑같고. 참, 하나는 오늘도 공부를 하려나? 같이 공부하자고 말하는 건 이상한가?
거기서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내 입이 더 빠르게 말을 던졌다.
“아... 그럼, 하나야, 너 집 가서 공부 할 거지?”
“응.”
“그럼, 나도 같이 해도 돼?”
“그래.”
결과적으로는 하나를 좀 더 볼 수 있게 되었지만, 하나의 앞에서는 역시나 제정신으로 있기 힘들다는 걸 또 깨달았다. 이렇게 되어버릴 것 같아서, 평소엔 보기 힘든 하나를 마주치려 할 때 마다 하나가 보기 전에 피했는데, 역시나, 보고 나면 진정할 수가 없다. 지금처럼.
*
책을 펼쳐놓고 공부하느라 내가 보는지도 모르는 하나를 계속 보고 있었다. 어차피, 하나와 함께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집중이 될 리가 없으니까.
“권셈! 니가 좀 가주라. 응?”
아까부터 게임을 하면서도 계속 눈치를 주더니, 두리가 나에게 간식을 가져와달라고 말했다. 눈치가 빠른 두리는 내가 하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다. 전에 경고를 받은 적도 있고. 그 녀석이 내게 말한 이후에.
“세모야, 두리 말고 네가 내려왔니? 두리 이 녀석, 또 게임하느라 널 시켰나 보구나. 미안하다. 이 쟁반을 들고 가서 맛있게 먹으렴.”
“네, 박사님. 잘 먹겠습니다.”
박사님이 직접 만드신 쿠키와 오렌지 주스. 하나는 아직도 열심히 공부 중이라 조심히 방문을 닫고 자리에 앉아서 하나를 꺼내서 집어먹어보니, 어렸을 때 자주 먹던 맛이 그대로였다. 아까 두리의 경고를 받았지만, 쿠키를 먹으면서도 눈이 하나에게 가는 것은 멈출 수 없어서 또 멍하니 보고 있었다. 연습장에 쓰더라고 가지런하게 한 줄, 한 줄 공식을 써 내려가는 곧고 하얀 손, 잠깐씩 막힐 때마다 찌푸려지는 눈썹, 좀만 더 흘러내리면 눈을 찌를 것 같이 아슬아슬한 앞머리 사이로 문제를 한가득 담고 있는 깊은 갈색 눈.
마지막으로 시선이 닿은 곳, 호수 안쪽 결코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깊은 구덩이,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눈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번에도 또 눈을 마주쳤다. 갑자기 구덩이 깊은 곳에서 내가 떠오르자, 바로 시선을 돌렸다. 돌리다가 언뜻 눈에 쿠키가 보이자, 이거라면 자연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하며 태연한 척 하나에게 쿠키를 건넸다.
“하나야, 이거 먹어. 박사님이 직접 만드신 쿠키야.”
“어, 응, 고마워.”
쿠키도 건네줬고, 지금은 하나를 쳐다보면 또 눈이 마주칠 것 같아서 눈에 들어오지 않는 문제를 계속 읽으려고 노력했는데, 엉뚱한 소리가 들려왔다.
“세모야, 너 웃으니까 잘생겼다.”
“켁, 뭐? 뭐라고?”
“아니, 그냥. 잘생겨 보여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말한 걸 알고 있지만, 머리로는 알았는데, 다시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피할 수가 없었다. 옆에 있는 두리가 살짝 웃은 게 들린 것 같기도 하고. 사례까지 들려서 계속 컥컥대다가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많이 놀랐어?”
“... 아냐, 괜찮아. 계속 공부하자.”
하나는 그 말 이후에도 문제없이 계속 문제를 잘 풀어나갔다. 얄밉게도.
나는 그런 말 안 했을 때도 집중을 못 했는데,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더 문제를 풀 수가 없잖아. 어떤 생각인 거야. 차하나.
중간에 또 하나와 눈이 마주쳤고, 오해를 받아서 하나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 뒤에는 문제없이 시간을 보냈다. 문제없이라고 해도, 나는 계속해서 하나를 보느라 공부를 못했지만. 집에 가기 위해서 짐을 다 쌌지만, 하나는 공부하느라 눈치를 못 챈 것 같아서 살짝만 말했다.
“나, 갈게.”
배웅해주려고 일어서는 하나를 말리고, 문을 열려는 순간에 벨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의 휴대폰에서 나는 소리였다. 별생각 없이 손잡이를 돌렸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그 녀석이다. 독고오공.
“아, 오늘 너한테 화학 2 빌리려고 했는데, 니가 먼저 갔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내일 너네 집 가서 공부하면서 좀 봐도 돼?”
“응. 그럼. 내일 와.”
내가 하나네 집에 간 걸 알고 있었단 말이지. 독고오공.
“오공이야?”
“응.”
“내일... 오공이 만나?”
“응. 우리 집에 공부하러 온대.”
“그럼, 나도 또 와도 돼?”
“응. 그래.”
하나와 함께 있는 게 좋지만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독고오공과 하나가 함께 있는 걸 알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독고오공은 내가 있는 걸 알면서 일부로 전화를 했다. 하나와 있으면서 몰렸던 피가 온몸에서 다 빠져나갔다. 배웅해주는 하나가 감자기 굳어버린 얼굴과 대답도 잘 못하는 나를 걱정스럽게 보는 것 같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하나를 더 걱정시킬 순 없어서 힘겹게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내일 봐.”
문이 닫혔다. 목소리만이 간신히 하나에게 닿았다. 다행이었다. 오늘은 더 이상 하나와 함께 있는 것이 위험했다. 지금 하나에게 얼굴을 보여주면 바로 감정을 들킬 것만 같았다.
‘권세모. 넌 내가 대도시 갈 때까지 하나한테 고백 못 할 거야. 안 하겠지.’
머릿속에서 시작된 소리가 귀까지 내려와 맴돌았다. 환청인 걸 알지만, 실제로 독고오공이 말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사실이었다. 난 겁쟁이고, 하나에게 고백할 용기도 없었다. 그 마음조차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만큼. 그렇지만, 계속 피했던 게 무색하게도 하나와 함께 있게 되면 이렇게 바보가 되어버린다. 그걸 알고 있는데.
하나야, 난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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